2002. 12. 『民族文化硏究』 37



조선후기 미발심론(未發心論)의 심학적(心學的) 전개

- 종교성의 강화에 의한 조선 성리학의 이론 변화 -


김  현


1. 머리말

2. 성리학에서 추구한 궁극적 실재

3. 송대 유학의 미발심론(未發心論)이 남긴 과제

4. 조선후기 성리학의 미발심론

5. 심선론(心善論)의 심학적(心學的) 성격

6.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시대 사민(士民)의 정신적 지도 이념이 되어 온 성리학에는 자연과 인간을 원리적으로 탐구한다고 하는 철학적 목표와 더불어 궁극의 실재(實在)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그것이 지시하는 바의 윤리적 삶을 영위한다고는 도덕적 목표가 있었다. 논자는 그 중 후자의 목표가 유교(儒敎)의 종교성(宗敎性)이라고 하는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궁극의 실재가 지시하는 도덕 명령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은 그 실재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적 행위의 한 양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理)라고 이름지어진 보편적이고 순수한 실재[道體]에 대해서 가졌던 믿음은 여타의 종교에서 관찰되는 그들 나름의 궁극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견주어 볼 때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력한 확신과 열정을 수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또는 성리학을 포함하는 유교 사상 일반을 종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교를 종교로 보지 않는 시각은 서구 사회의 전통적인 종교관에 따라 종교를 인격신(人格神)에 대한 신앙의 체계로 보는 데서 기인하는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종교철학자들의 종교에 대한 정의에서도 종교를 인격신에 대한 신앙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경신(敬神), 또는 그것이 수반하는 가치 체계에 대한 열망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면1) 굳이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교를 종교가 아닌 이지적인 철학사상으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는 서양인들의 전통적 종교관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현대 유교 사상가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유교의 정신적 유산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시도하였던 중국의 유교 사상가들은 당대의 서구 사회에서 종교의 힘이 약화되어 가고 과학기술문명이 발전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동양인의 정신적 지주인 유교를 굳이 구시대의 산물인 ‘종교’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2) 유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 이론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유교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사고에서 흔히 관찰되는 독존적 가치관에 얽매이기보다는 사고의 문을 개방하여 다른 문화의 우수한 점을 포용하는 이성적 학문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종교성보다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과 과거의 유교가 가졌던 종교적인 특질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논자가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유교, 조선시대의 성리학에 관해 그것이 지닌 종교적 특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학문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론으로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선(善)의 궁극적 실재[道體, 理]를 체인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자 한 신념, 열정을 더 두드러지는 자기 모습으로 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논자는 조선시대 18세기에 기호학파(畿湖學派)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던 심(心)의 순수성 여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의 배경에는 인간 심성(心性)에 대한 이지적 이해의 목적과 함께 도덕 실천의 근거가 되는 순선(純善)한 실체를 인간의 마음 속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논자가 이 글을 통해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논쟁의 전개 방향 가운데 후자에 관계된 부분은 무엇이며 그것에 의해 유도된 조선 성리학의 변화상은 어떠한 것이는가 하는 점이다.



2. 성리학에서 추구한 궁극적 실재


유교의 종교성을 논하려 한다면 가장 먼저 제기될 질문은 “그 가르침의 신봉자들이 의지하는, 영원성을 가진 궁극적인 실재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 전반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신봉된 궁극적 실재를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범위를 성리학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존재 원리이자 인간 본성의 근원으로 상정된 ‘이(理)’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God’이라고 하는 유일신의 존재를 믿는 데서 출발하는 종교인 것처럼, 성리학은 이(理)라고 하는 완전한 실재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무수한 논의가 있었던 만큼, 성리학의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유형의 노력, 즉 이(理)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왔는가? 논자가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는 성리학 내에 기독교에서의 신의 존재 증명에 비견될 만한 이론이나 노력이 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리학에서는 그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한 이(理)의 실재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 아니다. 이(理)의 실재는 기독교에서 신의 존재 여부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모든 가르침의 유효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지반이다.

기독교에서도 신의 존재 증명은 신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진 문제일 뿐이며, 학자들의 논의 여하에 관계없이 기독교를 종교로 신앙한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꾸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다른 방법이란 신앙인 개개인이 직접 ‘신을 만나는’ 종교적 체험이다. 성리학자들은 이론적으로 이(理)의 존재를 입증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이(理)의 완전한 모습 그 자체를 체험하려 한 것은  여타 어느 종교에서 그들의 ‘신’을 체험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성리학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편적이고 완전한 실재의 존재를 체험하였는가? 논자는 성리학의 신봉자들이 사용한 이(理)의 체험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고 본다.

그 첫 번째는 자연 속에 내재한 우주적인 원리를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정호(程顥, 明道 1032-1085)가 “만물의 생의(生意)는 가장 볼 만한 것”3)이라고 하여 우주적인 도체(道體)를 생생(生生)의 원리로 파악한 것은 활발한 생명의 기상을 드러내는 자연 만물을 보는 가운데 그 배후의 보편적 실재를 직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제사(祭祀)라고 하는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이(理)를 경험하는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제사는 자연에 대한 제사와 돌아가신 선조에 대한 제사로 대별할 수 있는데, 그 어느 쪽이든 제사의 직접적인 대상은 무형(無形)의 본체계(本體界)와 유형(有形)의 현상계(現象界) 사이에 있는 중간적 존재, 즉 귀신(鬼神)이다. 그런데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입장에서는 이 귀신이 영원한 이(理)의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유한한 기(氣)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통한 이(理)의 경험은 좀 더 복잡한 설명을 요하게 된다.

제사의 대상이 되는 귀신, 특히 후손의 제사를 받는 조고(祖考)의 혼백(魂魄)은 그가 죽은 후에 점진적으로 소멸해 가는 유한한 기(氣)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그 귀신이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 즉 조상의 신과 후손의 마음 사이의 감동적인 교감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이(理)의 존재가 전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행하는 돌아가신 이에 대한 제사는 단순히 사라져 가는 혼백(魂魄)을 잠시 모시고 추모하는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와 나를 하나로 묶어 주는 위대한 실체의 감응력(感應力)을 체험하는 신령스러운 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4)

세 번째는 평정(平靜)을 이룬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속에 깃든 궁극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하늘이 사람들을 태어나게 할 때 그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을 부여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5) 인의예지의 성(性)은 우주의 존재 원리인 이(理)가 그 본연의 완전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간에게 내재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자기 내면에 깃들인 완전한 실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정호(程顥)가 “몸 안에 가득한 것이 측은지심”6)이라고 하여 도체(道體)의 생의(生意)를 계승한 심체(心體)가 나의 내면에 있음을 이야기한 것은 그가 자연에서 우주적인 생의를 직관한 것처럼 인간 내면의 실재를 직관적으로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희(朱熹, 晦庵 1130-1200)를 통해 이루어진 송대(宋代) 성리학의 완성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 정이(程頤, 伊川 1033-1107)의 철학 속에서는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그는 궁극의 실재로서 인간의 도덕 본성의 근원이 되는 이(理)를 “단지 존재할 뿐 활동하지 않는 것”7)으로 규정하였다. 이(理)는 분명히 인간 내면에 성(性)으로서 존재하지만, 이 때의 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현상적인 모습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쉽게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보려고 심지사려(心志思慮)를 발동하는 순간 기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니 이 때 생겨나는 인간의 마음은 순수한 이(理)가 아니요, 기와 함께 뒤섞인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기이원적(理氣二元的) 전제 때문에 정이와 그를 계승한 주희의 성리학에서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궁극의 실재를 체현하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며, 그 이전의 상태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세워지게 되었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의 상태를 ‘미발(未發)’이라고 하며 그 상태에 포착되는 도체의 온전한 모습을 ‘중(中)’이라고 한다. 이 “미발의 중을 어떻게 체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성리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 왔다.



3. 송대 유학의 미발심론(未發心論)이 남긴 과제


1) 정이(程頤)의 미발설(未發說)


마음의 상태를 생각[思慮]이 싹트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그 각각에 대해 ‘미발(未發)’, ‘이발(已發)’이라고 하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정이에게서 비롯되었다.8) 미발․이발이라고 하는 단어는 물론『중용(中庸)』 경문(經文)에서 따온 말들이다.9) 그러나『중용』에서의 용례는 어디까지나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喜怒哀樂]과 같은 감정(感情)에 관한 것이었다고 보여지는데 반해, 그것을 ‘모든 종류의 생각’[思慮]으로 확대한 것은 정이가 인간의 심성 구조에 대한 일반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원리적인 측면[體, 性]과 현상적 발용의 측면[用, 情]으로 나누어 보고 이것을 각각『중용(中庸)』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에 분속시켰다.10) 따라서  일체 사려(思慮)는 심(心)의 발용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발(已發)에 속한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 이발의 상태는 이(理)와 함께 심(心)을 이루고 있는 기(氣)의 움직임이 있는 상태이다. 마치 흔들리는 물이나 굴곡이 있는 거울을 통해서는 사물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움직이는 마음 속에서 온전한 도체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속에 타재(墮在)한 궁극의 실재를 인간의 정신 작용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도덕 본성의 실체를 스스로 체험할 방법이 없다면 성리학이 목표로 하는 그 도덕 본성의 실현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정이는 미발의 중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어도 그 본성을 잘 보존하여 내 마음의 덕성을 키워 나아가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실천의 방법은 ‘경(敬)’과 ‘치지(致知)’이다.11) ‘경’은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뜨리지 않게 함으로써 부도덕한 생각의 발현을 막는 노력이며, ‘치지’는 인간의 선험적인 지각 능력에 의존하여 사물의 원리를 궁구해 나아가는 노력이다. ‘경’과 ‘치지’는 미발의 중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 수행은 이발(已發)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궁극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억제하는 노력 가운데 이(理)의 존재를 이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궁극의 실재에 대한 정이의 자세는 정의적(情意的)․종교적(宗敎的)인 것이라기보다 이지적(理智的)․학술적(學術的)인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이것은 형제 관계였던 정호와 정이의 차이점이며, 후대의 양명학과 구분되는 정․주 성리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특성을 드러내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주희(朱熹)의 미발심론(未發心論)


정이의 심성론의 특징은 그의 후계자 주희에게 계승되었다. 주희 역시 정이와 마찬가지로『중용』에서 말하는 미발(未發)은 심지사려(心志思慮)의 미발이라고 생각하였고, 일체의 사유는 이발(已發)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다만 그 심지사려의 미발이 논리적, 무시간적인 성(性)을 지목하느냐, 아니면 시간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마음[心]의 어떠한 상태를 지목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43세 이전에는 전자의 입장을, 그 이후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변화를 보였다.

주희 자신이 중화구설(中和舊說)12)이라고 이름한 그의 초기 견해는 사려(思慮)의 미발(未發)이 논리적 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어느 특정시간,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13) 따라서 이러한 전제에서는 미발(未發)의 때, 이발(已發)의 때를 시간적으로 구별할 수 없으며, 또 미발시(未發時)의 수양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14) 수양은 단지 사려가 발출한 이발(已發) 상태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희는 43세에 이르러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발(未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였다. 이른바 중화신설(中和新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희의 새 이론은 미발․이발이 무시간적․논리적 구분으로서의 ‘성(性)’, ‘정(情)’이 아니라 이(理)와 기(氣)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심(心)’ 안에서 ‘사려가 아직 발출하지 아니한 때’, ‘사려가 발출한 때’로 구분된다.15) 초기 이론에서는 ‘성’으로 간주되었던 미발이 후기 이론에서는 ‘심’의 상태로 옮겨온 것이다. 이 미발의 심은 이와 기가 함께 있되 그 심의 기가 아직 움직이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기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않지만 지각은 명료하게 깨어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주희가 생각한 심의 미발이었다.

주희의 구설과 신설은 모두 인간 내면에 궁극의 실재[道體, 理]가 온전한 모습[中]으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점은 전자에서는 그것이 성(性)으로 이해되었던데 반해, 후자에서는 심(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차이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발을 논리적으로만 인식하였던 구설에서는 미발의 중을 겨냥한 심성 수양이 이발의 상태에서 마음의 기미를 살피는 우회적인 방법이었던 데 반해,16) 신설에서는 특정 시간(미발의 때)에 미발의 중을 보존하는 수양이 가능해진다.17) 도체의 순수함이 현상적인 심 안에서도 확보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중화신설도 순수한 도체를 인간이 직접 체인하고 그것을 내 마음의 온전한 주체로 삼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가 미발심(未發心)에 대하여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어도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다”18)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를 말한 것일 뿐 마음이 주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도체의 모습을 밝게 드러내는 경지를 말한 것은 아니다. 주희가 ‘미발의 때’를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체의 사유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정태적인 상태이다. 이발이 되는 순간 이(理)의 순수성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차별적인 기(氣)는 미발의 상태에서도 존재한다. 단지 그것이 아직 활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평정한 상태[中]되 유지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조선후기 성리학의 미발심론


1)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의 미발심체논변(未發心體論辯)


미발심론은 심성 수양에 관계된 중요한 이론이었던 만큼, 성리학을 국가적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의 지식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주희의 중화신설을 좇아 미발을 성(性)이 아닌 심(心)의 단계에 두되 심지사려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고요한 마음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18세기 초에 이르러 서울․충청 지역에 거주하던 기호학파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이 미발심이 과연 도체(道體)와 마찬가지로 순선하다고 볼 수 있느냐의 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권상하(權尙夏, 遂庵 1641-1721)의 문인 한원진(韓元震, 南塘 1682-1751) 남당)과 이간(李柬, 巍巖 1677-1727) 사이에서 발단한 이 논변은 그 뒤 윤봉구(尹鳳九, 屛溪 1681-1767)와 이재(李縡, 陶庵 1680-1746)의 사이의 논변으로 발전하였고, 급기야는 서울․충청 지역 성리학자 상당수가 이에 가담함으로써 후세인들로부터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그들의 논변의 주제는 크게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순선(純善) 여부, 성인심(聖人心)과 범인심(凡人心의) 동이(同異) 등 3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논쟁의 핵심을 이룬 부분은 바로 미발심체의 순선 여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다른 견해를 가졌으며, 양자의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들의 대표적인 입론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한원진의 심론

이간의 심론

마음은 기(氣)가 모여서 된 것으로 그 체(體)는 본래 허(虛)하다. 허하므로 어둡지 않지만[不昧], 기이기 때문에 가지런하지 않다[不齊]. 그 체가 본래 허하고 어둡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선(善)이지만,  그 기가 모여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선․악(善惡)이 있다. 선이라고 하면서 또 선․악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어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성(性)이 기(氣) 안에 있되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허하고 밝아 중(中)을 이룬 것을 대본지성(大本之性)이라 하고, 그것이 기품에 영향받아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는 것이다.

『대학장구』에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 가지 일에 응한다”고 하는 것은 본연지심(本然之心)이며, “기품에 구애받는다”고 하는 것은 기질지심(氣質之心)이다. 심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애받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두 가지 가리킴이 있게 된 것이니 이른바 대본지성(大本之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연지심으로부터 [이(理)만을] 단독으로 가리킨 것이요,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질지심으로부터 [이(理)와 기(氣)를] 아울러 가리킨 것이다.

“心者氣之聚而體本虛也. 虛故不昧, 氣故不齊. 自其體本虛而不昧者言, 則謂之善; 自其氣之聚而不齊者言, 則謂之有善惡. 然則其謂善而又謂有善惡者, 言各有所指, 而未嘗相妨也. 性在氣中者, 卽其未發虛明而中, 則謂之大本之性; 兼氣之氣稟不齊而言, 則謂之氣質之性.” (韓元震, 「擬答李公擧 附未發五常辨」,『南塘集』 권11 書 33a)

“大學章句言之, 其曰: 虛靈不昧, 以具衆理應萬事者, 此本然之心也. 其曰: 爲氣稟所拘者, 此氣質之心也. 心非有二也, 以其拘與不拘, 而有是二指, 則所謂大本之性者, 當就其本然之心而單指, 所謂氣質之性者, 當就其氣質之心而兼指矣.” (李柬, 「未發辨」,『巍巖遺稿』 권12 雜著, 30b)


대조 인용한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한원진과 이간은 똑같이 인간의 마음에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주희가 그의『대학장구』에서 언급한 심의 양면성이다. 주희는 “명덕(明德)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 가지 일에 대응하는 것이다. 단 기품에 구애되고 인욕에 가리워져 때때로 어둡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9) 심의 ‘허령하고 어둡지 않은’ 면에 대해서 한원진은 ‘선하다고 한다’[謂之善]고 하였고 이간은 ‘본연지심(本然之心)’이라고 하였다. ‘기품에 구애되고 인욕에 가리워져 때때로 어둡게 되는’ 면에 대해서 한원진은 ‘선과 악이 있다고 한다’[謂有善惡]고 하였고 이간은 ‘기질지심(氣質之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심의 두 가지 모습으로 추연하여 성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데에 한원진과 이간은 똑같이 동의한다. 전자[善, 本然之心]를 통해 파악한 인간의 본성은 ‘대본지성(大本之性)’이며 후자[有善惡, 氣質之心]을 통해 파악한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두 사람의 주장은 차이는 무엇인가?

한원진과 이간이 똑같이 심의 양면성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심이라고 하는 실체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했느냐에 관해서는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원진은 순수한 이(理)와 가지런하지 않은 기(氣)가 합쳐진 것을 심체(心體)로 보았기 때문에 심 그 자체에 대해 “허하면서 가지런하지 않다”, “선하면서 선악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이간은 순수한 이(理)와 순수한 기(氣)가 합쳐진 것을 심체로 보았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본연지심’이다. 이 본연지심은 심이 아닌 다른 무엇에 구애받을 때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데, 그것을 일컬어 ‘기질지심’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결국 두 사람의 이론의 차이는 기의 가지런하지 않은 속성이 심체의 속성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심체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양인의 다음과 같은 논설은 그들의 심 개념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한원진의 심기 개념

이간의 심기 개념

미발 상태의 심이 비록 모두 맑은 모습으로 허명(虛明)하다고 해도 그 기품 본색의 청탁수박(淸濁粹駁)은 일찍이 저절로 존재하지 않음이 없다. 그 청탁수박으로부터 말하면 심에 선․악(善惡)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는 하나이되, 그 가운데 거친[粗] 것은 혈기(血氣)요 정미한[精] 것은 신명(神明)이다. 정미하고 거친 것을 총괄하여 기라고 하지만, 이른바 심이라고 하는 것은 혈기가 아니고 신명이다. 심체는 매우 정미하지만 기질은 매우 거칠다. 심체는 지극히 크지만 기질은 매우 작다.

“心之未發, 雖皆湛然虛明, 而氣稟本色之淸濁粹駁, 未嘗不自在矣. 自其淸濁粹駁者而言之, 則謂之心有善惡可也.”(韓元震, 「上師門」, 『南塘集』권7 書, 18a)

“夫氣一也, 而語其粗則血氣也, 語其精則神明也. 統精粗而謂之氣, 而所謂心則非血氣也, 乃神明也. 心體也至精而氣質也至粗, 心體也至大而氣質也至小.”(李柬, 「未發辨後說」, 『巍巖遺稿』  권13 雜著, 1a-1b)


한원진과 이간은 모두 기의 속성이 가지런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 ‘청탁수박(淸濁粹駁)’이나 ‘정조(精粗)’는 모두 사물의 질적인 차이를 유발하는 기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원진은 기의 그 같은 다양성이 심 안에 모두 포섭되어 있다고 본 데 반해 이간은 오직 기의 정미한 부분만이 심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이간이 심기의 속성을 ‘정미한 것’으로만 한정지은 것은 주희가 “심은 기의 정상(精爽)”20)이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를 정미한 것과 거친 것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심기와 혈기에 항구적으로 분속시킨 것까지 주희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기는 변화․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하다가도 거칠어질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원진은 주희의 기 개념의 원의를 충실히 따르는 입장을 취했다. 그 역시 “심은 기의 정상”이라고 한 주희의 말을 의식하여 미발 상태의 심은 허명(虛明)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 본연의 속성은 청탁수박(淸濁粹駁)의 다양성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에서 보면 심에 선․악의 요소가 병존한다고 한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성리학적의 기본 전제에 충실했나를 따진다면 그것은 이간보다는 한원진 쪽일 것이다. 이간이 성리학적  이기 개념의 제약을 떨쳐 버리고 선택한 것은 도체(道體)와 하나가 되어 스스로 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심의 주재적(主宰的) 위상이었다. 이간은 자신의 미발심론과 한원진의 미발심론의 차이를 다음과 지목하였다.


명덕(明德)은 천군(天君)이요, 혈기는 기질이다. 천군이 주재하면 혈기(血氣)가 몸 안에서 물러나 복종하고 마음은 허명해지니 이것은 대본이 있는 곳으로서 자사(子思)가 말한 미발이다. 천군이 주재하지 않으면 혈기가 마음 속에서 용사하여 맑고 탁한 것이 가지런하지 않게 되니 이것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바로서 덕소(德昭, 한원진의 字)가 말한 미발이다.21)


천군(天君)은 심(心)을 말함이다.22) 그 심이 이(理)의 순수함과 기(氣)의 활동력으로서 주재력을 발휘하여 몸 안의 조박(粗駁)한 혈기를 복종시키는 상태, 이간은 이것이 바로 자사(子思)가『중용』에서 말한 미발의 중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한원진의 미발 개념에 대해서는 “천군이 주재하지 않아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상태”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전혀 무근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원진이 견지하고자 한 정․주 성리학의 미발은 기의 활동성을 최대한 억제한 정태적인 개념인데, 이는 ‘도체의 주재력’에 기반한 선의 가능성보다 ‘기의 가지런하지 않음’에 기인한 악의 가능성을 의식한 데서 만들어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 인정해 온 미발의 중(中)은 비록 그것이 심의 단계에 있다고는 하나 마음 속에서 아무런 사유 작용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용에서 원래 뜻하였던 ‘희노애락의 미발’보다 심의 활동성을 훨씬 약화시킨 개념이다. 그러나 이간에게 있어서는 ‘미발’이 ‘일체의 사려가 없는 상태’라기보다는 ‘도의심이 충만하여 욕망을 물리친 상태’이다. 어떻게 보면 중용에서 말하는 ‘희노애락의 미발’보다 심의 활동성을 더욱 강화시킨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간의 이와 같은 미발심론은 심(心)의 기(氣)가 이(理)에 짝할 수 있는 순수성을 지닌다고 하는 전제에서만 성립한다. 이간은 심기의 순수성을 확신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이(理)와 기(氣)가 한 가지이고, 혈기(血氣)에 영향받지 않은 심(心)은 성(性)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하는, 이른바 이기동실(理氣同實)․심성일치(心性一致)의 논을 주장하였다.


미발(未發)은 무슨 의미이며 어떠한 경계인가? 이것은 실로 이(理)와 기(氣)의 큰 근원[大原]이며 심과 성의 근거지[築底處]이다. 큰 근원이며 근거지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와 기가 한 가지이고[理氣同實] 심과 성이 일치하는[心性一致] 것으로 말한 것이다.23)

이간의 이 같은 사고는 기의 차별성에 근거하여 도(道)와 성(性)을 구분하고 또 성(性)과 심(心)을 나누어 보는 정이(程頤)-주희(朱熹) 계열 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사실상 이간의 생각은 이 점에서 즉 정이․주희의 사고를 계승한다기보다 정호(程顥)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호 역시 이(理) 또는 천리(天理)를 말했지만 그가 말한 천리는 정이(程頤) 식의 이기(理氣) 구별이 없는 실체였으며, 그것을 확장하여 도체(道體)․성체(性體)․성체(誠體)․경체(敬體)․신체(神體)․인체(仁體)․심체(心體)가 모두 하나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존재하면서 활동하는 것이다.24) 이간 역시 자연의 궁극적 실재인 도체(道體)와 그것이 인간에게 타재(墮在)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이루는 성체(性體) 그리고 인간의 몸을 주재하는 정신작용으로서의 심체(心體)가 분단 없는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순수성에 있어서 동일한 위상에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여진다.


2) 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의 심체즉도체(心體卽道體) 관념


이기동실(理氣同實)․심성일치(心性一致)의 사고를 통해 정이․주희보다는 정호에 접근한 이간의 심론은 그가 한원진과 논변할 당시 그의 편을 들었던 서울 지역 학자들25)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재(李縡)와 그의 제자 임성주(任聖周) 사이에서 오고간 도체의 유행과 심성 수양의 관계에 대한 대화는 정호(程顥)의 사상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임성주 :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약동함’[鳶飛魚躍]에 대해 정자는 ‘일을 하되 예견하지 않음’[有事勿正]의 뜻과 마찬가지로 활발발(活潑潑)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재 : “솔개는 반드시 하늘로 솟아오르고, 물고기는 반드시 못에서 뛰노니 이러한 것들은 인위(人爲)를 용납함이 없이 천리(天理)가 자연스럽게 유행하는 묘처이다. 일을 하되 그 효과를 예견하지 않는 동안에는 한 가닥의 사사로운 뜻도 끼여들지 않고 천리(天理)가 자연스럽게 유행하니, 이것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마땅히 묵회(黙會)하여야 할 것이요, 언어로써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26)


‘연비어약(鳶飛魚躍)’은 도체의 활발한 유행에 대한 비유로서 성리학자들이 즐겨 인용해온『시경(詩經』의 싯구이며, ‘유사물정(有事勿正)’은『맹자(孟子)』 「부동심장(不動心章)」에 나오는 심성(心性)의 수양법이다. 이 두 가지 귀절에는 모두 활발한 생동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 정자(程子)의 말은『정씨유서(程氏遺書)』에 기록된 정호(程顥)의 말이다.27) 이렇듯 도체와 수양을 한 가지로 이야기한 정호의 말이 어떠한 뜻인지를 물은 임성주에게 이재는, 인위(人爲)를 용납함이 없이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묘처를 말했다는 점에서 한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도체의 유행과 심성 수양을 하나로 보는 시각은 명백히 도체(道體)․심체(心體)․경체(敬體), 즉 본체와 마음과 수양을 분단 없는 한 줄기로 이해하는 정호의 입장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재는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유사물정(有事勿正)이 뜻하는 바가 동일하며 활발발(活潑潑)하다”고 한 말의 뜻은 언어로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묵회(黙會)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언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한 그 경지는 이간(李柬)이 앞서서 추구했으며 이재(李縡)가 동의하였던 도체와 심체의 합일, 즉 이기동실(理氣同實)․심성일치(心性一致)의 경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주의 이기이원론적 전제하에서는 이(理)와 기(氣)가 별개의 실체이며 활동성은 기에만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체와 심체가 같은 것일 수 없고 더구나 활발하다는 표현을 쓰기에도 부적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경지, 즉 순수성과 활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실체는 언어와 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재를 통해 정호와 이간의 심론을 깊이 있게 이해한 임성주는, 이(理)와 기(氣)를 일차적인 것으로 보고 심(心)은 그 이와 기가 만나서 이루어진 이차적 존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심 그 자체를 일차적인 것으로 보고 도체 역시 그에 상응하는 일원적 존재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더욱 강화시켜 갔다. 그는 이기동실(理氣同實)․심성일치(心性一致)의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28) 이를 통해 미발의 때에 도체의 활발한 유행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히고자 하였다. 그는 미발 심체 속에서 도체의 온전한 모습[中]을 만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계(梁溪)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중(中)을 구할 것인가? 그 근원을 곧바로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중용(中庸)』에서는 희노애락의 미발을 중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그 근원을 궁구한 것이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 중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상제께서 하민들에게 충(衷)을 내리심에 하민들은 천지의 중(中)을 받아 태어났다. 한 쪽에서는 충을 내리고 한 쪽에서는 중을 받았으니 이것이 중의 소종래(所從來)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을 중이라고 하는가? 요컨대 그것은 천지간의 하나의 태화(太和)의 기(氣)일 따름이다.『역(易)』에 이르기를 ‘천지가 인온(氤氳)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태화(太和)이다” [여기까지가 인용] 이것은 기(氣)를 중(中)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요, 중은 기의 조화로운 곳에 있는 것이니 바로 이른바 이(理)인 것이다. 명도는 말하기를, “형이상은 도(道)가 되고, 형이하는 기(器)가 된다. 모름지기 이와 같이 말하기는 하나, 기(器)가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기(器)이다”라고 하였고, 또 “음양은 형이하의 것인데도 도라고 하였으니, 오직 이 말[『역(易)』의 ‘一陰一陽之謂道’]이 위아래를 관통하여 가장 분명하다. 원래 다만 이것이 도(道)이다. 사람들은 묵묵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정․고(程高)의 말이 완전히 합치되니 그 향내가 마치 난초와 같다.29)

   

중(中)이란 무엇인가? 마음 속에 깃든 도체의 온전한 모습이다. 그 중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임성주는 명유(明儒) 고반룡(高攀龍, 景逸 1562-1626)30)의 말을 빌어 그 근원을 곧바로 궁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 속의 도체를 직접 체인하라는 이야기이다. 하늘이 내리고 인간이 받은 그 도체를 고반룡은 ‘태화(太和)의 기(氣)’라고 하였지만, 임성주는 그 기가 정주계 성리학에서 말하는 청탁부제(淸濁不齊)의 기로 오인될 것을 염려하여 ‘기의 조화로운 곳’을 의미한다고 하였고, 그것이 곧 ‘이(理)’라고 부연하였다. 이어서 임성주는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가 “도역기, 기역도(道亦器, 器亦道)”의 관계로서 일관되어 있다고 한 정호의 말을 인용하고 이 뜻은 고반룡의 말과 완전히 합치한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형이상’은 태화의 기 또는 이(理)로서의 도체를 말하는 것이고 ‘형이하’는 현상계의 사물로서의 심체를 말한다. 도체는 곧 심체이고 심체는 곧 도체이니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분단이나 차별이 있지 아니하다. 내 마음을 곧바로 궁구함으로써 도체의 온전한 모습을 체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심선론(心善論)의 심학적(心學的) 성격


심선론자들이 미발심체의 순수성을 주장한 이유는 도덕의 근원인 이(理)를 본체의 세계 또는 추상적인 성(性)의 단계에만 있게 할 경우, 그것은 도체(道體)의 존재를 이성적 또는 논리적으로만 인식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도체의 완전한 모습이 성에 있느냐[性善論] 심에 있느냐[心善論]의 차이는 작은 것이 아니다. 완전한 실체, 순수한 도체가 내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자[性善論]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 도체에서 발현되는 도의심을 생생하게 느끼며 그것이 나의 생각과 행동의 주재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후자[心善論]의 이론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간․이재․임성주 등은 이기동실(理氣同實)․심성일치(心性一致)의 전제 위에서 미발의 때에 도체의 활발한 유행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심선론자(心善論者)들의 주장은 정통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입장을 고수하는 학자들의 시각에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으로 간주되었다. 이간과 대립하였던 한원진은 자신의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석씨(釋氏)에서 육씨(陸氏), 육씨에서 왕씨(王氏)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관되게 심을 최고의 것으로 삼아오면서 스스로 지선(至善)의 묘용(妙用)을 얻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기질의 조악한 자취를 좇는 것일 뿐이다. ..... 심을 순선하다고 여기고 심과 기품을 둘로 나누는 이론은 예전에 없었던 것을 이공거(李公擧, 이간의 字)가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다. 이제 그 설이 크게 유행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 모여 강학하는 자리에 선(禪)을 일삼으니  큰 근심이다.31)


심선론(心善論)을 불교 또는 육왕학(陸王學)의 교설로 간주한 한원진의 비판은 정당한 것인가? 이재와 임성주의 제자로서 역시 심선론의 입장에 섰던 임정주(任靖周, 雲湖 1727-1796)는 한원진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당옹(塘翁)은 자신을 순자․양웅이 비긴 비난에 대하여 심선론(心善論)을 불교(佛敎)의 본심(本心)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과연 공변된 말인가? 무릇 우리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심선(心善)은 본심이 지극히 맑고 더럽지 않기 때문에 능히 본성(本性)의 순선무악(純善無惡)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발(未發)의 때에는 조용하면서도 깨어있어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 되고 이발(已發)의 때에는 바르고 반듯하여 만사의 기강(紀綱)이 된다. 천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내 마음의 체(體)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세상의 사물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용(用)이 관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심(本心)이 과연 그러한가? 저것[佛敎의 心]은 자연을 종(宗)으로 삼아 그것이 곧 마음이요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요, 이것[儒家의 心]은 이(理)와 합일하여 악(惡)을 변화시키고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심(心)과 성(性)에 똑같이 선(善)이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해도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으며, 유가와 불교가 똑같이 심(心)이라는 글자를 썼어도 그 뜻은 실로 상반된다.32)


심선론의 입장을 옹호하는 임정주는 자기들의 주장이 한원진이 비판한 바와 같은 불교의 유심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 차이를 불교는 인간의 자연성 그 자체를 심으로 여긴 데 반해 자신들의 심론은 도덕적인 본심을 위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같지 않다는 주장을 하였다. 임정주의 이 같은 주장은 한원진의 비판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 될 수 있을까?

임정주는 심선론이 불교의 심론과 다르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는 했어도 자신들이 심(心)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본체의 차원에 있는 이기(理氣)보다 현상적인 차원의 심(心)에 무게 중심을 더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정주학(程朱學)의 기본 궤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인데, 임정주는 이 핵심을 피한 채 자신들의 심이 불교의 심과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만을 내세운 것이다.33)

한원진과 이간은 서로를 순자(荀子)․양웅(揚雄), 불교(佛敎)․심학(心學)으로 몰고 이단시함으로써 상대를 격분시켰지만, 논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비판이 모두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고 또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주의 성리학은 송대 이전의 전통학문[漢唐儒學]이나 외래사상[佛敎]과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본체의 순수함이 내재되어 있다고 사고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34) 기의 부제(不齊)함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 속에 선악의 양면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한대 유학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 사고를 함께 수용하면서 그 양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주(程朱) 계열 성리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미발심체논변은 그 균형에 균열이 일어났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 때 이간과 낙론계 학자들이 지향한 바는 불교의 영향으로 강조되었던 요소, 마음 속에 있는 도체를 자각하고 그것을 확충하는 면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이 심화되어 가면서 따라간 궤도는 심을 궁극의 실재와 일치시키는, 결과적으로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 계열의 중국 심학(心學)이 추구한 방향과 유사한 것이었다35).


6. 맺음말

이간과 낙론의 심설(心說)의 특징은 존재 근거인 이․기(理氣)의  문제나 순수리(純粹理)인 본연지성보다는 인간의 주체성인 심(心)을 중시했다는 점으로 모아질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육․왕의 심학에 상통하는 일면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치라고만은 볼 수 없다. 이간․이재․임성주․임정주 등과 같이 심선론을 고수한 인물들은 자신의 이론이 불교와 육․왕에 가깝다는 비판을 의식하는 가운데에도 이론의 무게 중심을 이기(理氣)나 성(性)에서 심(心)으로 옮겨 왔으며, 급기야는 이상적인 심(心)의 모습에서부터 거꾸로 추연하여 이기(理氣)의 구별을 넘어선 일원적(一元的)인 도체(道體) 관념을 형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은 그 학문의 목표와 의의를 확고하게 정립한 이황(李滉, 退溪 1501-1570)이 양명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한 영향으로 그것이 동시대 중국 사상계의 주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간과 낙론계 학자들은 정주학의 심성론 안에서 심체를 도체와 일치시키는 ‘심즉리(心卽理)’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생적인 심학 이론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심학화 경향이 조선 성리학의 전반적인 추세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기호학파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 학파 안에서도 이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아, 한원진과 같은 이는 그러한 심학화 경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조선 유학계에서는 낙론계 기호학파가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집단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들의 심학적 이론을 일부 학자의 예외적인 주장 정도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논자가 이 점에서 주목한 것은 조선 성리학의 심학화 경향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는 종교적 열정에 비견해도 무방할 강력한 의리지향적 사고가 그와 같은 내재적 변화를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이(理)라고 이름지어진 궁극의 실재가 만물의 존재 원인이자 인간 사회의 모든 도덕율의 근원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적 이론만으로 도덕의 실천을 유발하는 모든 장치가 마련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물고기가 물 위에서 뛰고, 솔개가 창공을 날게 하는 활발한 기상을 내 마음 속에서 체감함으로써, 그러한 기상을 일으키는 궁극의 실재가 내 마음을 이끄는 주재자가 되어 있음을 확신함으로써 그가 명령하는 윤리 도덕에 대한 의지적 결단과 실천적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마티뉴(James Martineau, 1805-1900)는 “종교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을 통해서 선의 완전한 실재를 표현하는 시도”36)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심학화 경향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 도체의 완전한 실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의 소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 “진실로 종교란, 우리가 경신(敬神)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순수하고 경건한 성향이나 상태를 말한다.”(C. P. Tiele, 1830-1902) /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세속적인 인본주의나 공산주의도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종교적인 특징들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인간의 진보와 민중 국가를 궁극적인 실재로 보고 그러한 것을 수반하는 가치 체계와 열망을 승인한다.”(마이클 피터슨 외 공저, 하종호 역,『종교철학』,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p.8~11).


2)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1902년 ‘공교비종교론(孔敎非宗敎論)’을 발표하여 유교를 종교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합리적 개방적 학문으로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금장태,『유교사상과 의례』, 예문서원, 2000, p.35 참조).


3) “萬物之生意最可觀.”(程顥,『程氏遺書』권11, 明道先生語1).


4) 이이(李珥)는, 먼 조상은 후손들의 정성과 더불어 서로 감통할 수 있는 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불멸의 이(理)가 감통(感通)의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 조상에 대한 제사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사자(死者)와의 감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 비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운기(雲氣)가 없었어도 비가 내릴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李珥, 「死生鬼神策」,『栗谷集』 拾遺 권4, 23a).


5) “蓋自天降生民,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朱熹,『大學章句』 序).


6) “滿腔子是惻隱之心.”(程顥,『程氏遺書』권3, 二先生語3).


7) 牟宗三,『心體與性體』一冊(臺北 正中書局, 民國57), p.44.


8) “旣思, 卽是已發. [原註: 思與喜怒哀樂一般]”(程頤,『程氏遺書』권18, 伊川先生語4).


9)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達道.”(『中庸』 1章).


10) 정이(程頤)는『중용(中庸)』의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易』 「繫辭」의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禮記』 「樂記」의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를 모두 동일한 맥락의 것으로 해석하여 미발(未發)의 중(中)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한 심(心)의 본체[性], 이발(已發)의 화(和)는 외물(外物)에 접하여 사려가 생겨 난 상태[情]에 연계시켰다(徐復觀,『中國人性論史』(臺北 中央書局, 民國52) p.130 참조).


11)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程頤,『程氏遺書』권18, 伊川先生語4).


12) ‘中和舊說’이란 주희가 37세 때 그의 벗 南軒 張敬夫에게 보낸 편지 및 그밖의 서한에서 밝힌 中和 문제에 관한 그의 초기 이론을 말한다. 훗날(43세때) 주희는 자신의 이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뜻에서 ‘中和舊說’이라 명명하고 아울러 자기 사상의 변화 추이를 밝히는 「中和舊說序」를 저술하였다.


13) 朱熹, 「與張欽夫」,『朱子大全』권30.


14) “今著一時字一際字, 便是病痛.”(同上).


15) 朱熹,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朱子大全』권64.


16) 주희의 초기 이론에서는, 이발의 상태에서 발현하는 양심의 싹을 세밀하게 살피고[致察] 붙들어 보존하는[操存]함으로써 미발의 중(中)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朱熹, 「與張欽夫」,『朱子大全』권30).


17) 朱熹, 「答張欽夫」,『朱子大全』권32.


18) 同上.


19)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而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朱熹,『大學章句』1章).


20) “心者, 氣之精爽.”(朱熹,『朱子語類』 권5 性理2).


21) 李柬, 「未發辨」,『巍巖遺稿』, 권12 雜著, 26b.


22) “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荀子』 17, 天論).


23) 李柬,「未發辨後說」,『巍巖遺稿』 권13 雜著, 4b


24) 牟宗三,『心體與性體』 一冊(臺北 正中書局, 民國57), p.44.


25) 이들의 학문은 ‘서울’ 지역 학자들의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으로 불리웠다.


26) 任聖周, 「寒泉語錄」,『鹿門集』권17 雜著, 9a.


27)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此一段子思喫緊爲人處, 與‘必有事焉而勿正心’之意同, 活潑潑地.”(程顥,『程氏遺書』권3 二先生語3).


28) “論理氣, 則必以理氣同實․心性一致爲宗指.”(任聖周, 「答李伯訥」,『鹿門集』 권5 書, 6a).


29) 任聖周,「心性雜詠」,『鹿門集』권26 詩, 20a-20b


30) 고경일은 명나라 말기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사회를 학문으로써 구원하고자 했던 동림학파(東林學派)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양명학의 말폐를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주자학을 표방하였으나 그의 학문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는 그를 주자학과 양명학의 절충주의자로 보는 것이다(黃宗羲,『明儒學案』(臺北 中華書局, 民國59), p.321 / 錢穆,『宋明理學槪術』(臺北 學生書局, 民國66), p.390 참조).


31) 韓元震, 「心純善辨證」,『南塘集』권11 書, 33a.


32) 任靖周, 「與金領府論韓南塘心說」,『雲湖集』권1 書, 11a-24a.


33) 심선론(心善論)이 유교적인 도덕 가치를 궁극의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적 선악(善惡) 구분마저도 넘어서고자 한 불교와의 차별성을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체와 도체를 동일한 위상에 놓으려 한 점에서 본다면 이간과 그를 지지한 낙론 계열 학자들의 심론이 육․왕(陸王) 계열의 심학(心學)에 근접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34) 유학 안에서 이러한 사고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물론 맹자(孟子)의 성선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대유학(漢代儒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맹자의 사상이 성리학의 핵심사상으로 부각된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사상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5) 이간으로부터 이재, 임성주, 임정주 등에 이르는 미발심체순선론자들의 입장이 실제로 중국 심학이 추구한 이론과 유사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이론 사이의 엄밀한 비교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심학에 대한 필자의 연구가 아직 미진한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교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미루고자 한다. 또한 이 점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조선 기호학파 심선론(心善論)의 ‘인간 내면의 도덕적 주체성’에 대한 강조와 중국 심학에서 심즉리설(心卽理說)로 표현된 내면주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보인다고 하는 점이며, 양론의 교설이 전반적으로 조응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둔다.


36) 마이클 피터슨 외 공저, 하종호 역,『종교철학』,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8.